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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oudn't have p.p. '죽은 자의 집 청소'
    Reviews/Books 2020. 11. 16. 23:59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그리고 가난해지면 더욱 외로워지는 듯 하다."

     

    "당신이 하는 일 처럼 내 일도 특별합니다."

     

    "심려 깊은 자여, 어느 날 부질없이 근심이 일어나면 그날로 후후 불어버리자. 또 그 자리에 아직 불안과 걱정이 남았다면 걸레질하듯 손을 뿌리치며 훌훌 털어버리자."

     

    "지상의 그 어떤 더럽고 난처한 것도 군말 없이 받자누는 한량 없이 너그러운 존재가 있다면 바로 변기일 것이다."

     

    "그런 자살 도구는 죽은 이가 맞닥뜨려운 하루하루의 일상과 생계를 밝히는 수단인 동시에, 죽음에 이른 과정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마 꽤 어렸을 때 부터였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문득 한 적이 있다. '나는 어디서부터 왔을까?' 라는 생각. 어쩌면 가장 당연하게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어서 발생 과정을 통해서 성장을 한 뒤에 태어났겠지. 그런데,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고, 그에 따라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하는 하나의 '주체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언제부터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에는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심지어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은 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이게 어렸을 때의 기억인지, 아니면 어떤거에 의해서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고 덮어씌워졌을지 자신할 수 없는 기억만을 가지고 있고. 그러다 보니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죽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게 느껴졌다. 마치 자는 시간이 길게 이어지는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그리고 내가 나로서 행동하는게 끝나면, 그 뒤의 시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막연한 생각들을 하고 있으면 죽는다는 것도 참 큰 용기를 가져야 된다고 느끼게 되었다. 어쩌면, 이 또한 배부른 고민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가 그랬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10년정도의 시차가 존재한다고. 그래서 일본에서 일어나는 지금의 현상이 한국의 10년뒤의 미래라고. 뭐, 지금은 꼭 그런건 아닌 것 같지만 혼자사는 사람이 늘어나고,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혼자 지내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차원에서는 그 말도 맞는 듯 하다. 한국이 그렇게 된 배경에는 경제적인 문제와 사회인으로서의 활동 또한 한 몫을 하긴 했지만. 

     그러다보니 고독사라는 문제 또한 자연스럽게 수입이 된듯한 느낌이다. 아니, 어쩌면 원래도 있었지만 이제서야 부각이 되는 것일수도 있겠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다같이 논의를 해봐야 되는 부분이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위 저자가 위의 직업을 갖게된 것도 어떻게 보면 '수요'가 있기 때문에 택한 것도 없지않아 있을테니까.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보람차다 하더라도 그것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유지가 될 수 없으니.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고독사가 생기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돈'이라는 것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그 돈이 부족한건 아닌지 확인해 보세요.'라는 말. 물론, 어느 수준 이상이 된다면 한계효용치는 급감하긴 한다. 하지만 그건 '어느 수준 이상'일 경우고, 일반인일 경우에는 그 수준까지 도달하기도 힘들다. 아니, 어쩌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도 힘든 사람일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미래를 볼 수 없기에, 현재도 힘들기 때문에 없는 용기를 쥐어짜서 마지막으로 가장 최선을 다하여 흔적을 남긴게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그마저도 '돈'이라는 이유 때문에 뒤늦게 발견이 된다. 아마, 누군가한테 '받아야 될 돈'이 없고, '나가야 될 돈'이 정상적으로 나가고 있다면 더 오랜시간 뒤에 찾게 되었을 것이다. '돈'이라는 것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가장 큰 용기를 낸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함부로 뭐라고 하지는 못한다. 마음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절대적인 무게가 없기 때문이다. 전부다 상대적인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깃털같이 가벼운 것도 상대방한테 있어서는 철근보다 더 무거워서 짓누르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인 경우도 있겠지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세상을 등진 사람의 '마지막 흔적'을 정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미 지난 입장에서 추론하는 것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약간의 관심이 있었으면 이런 결과까지 나왔을까 라는 생각이 가득하지 않았을까. 

     그런 무거움을 아는 사람이기에 무작정 살라고 이야기 하지도 못할 것이다. 희망적이라고 이야기 하지 못할 것이다. 책임질 수도 없을 말을 하지도 못할 것이다. 어찌 감히 그 무거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살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같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 기재하였다 하고.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됐는데 그렇게 해버린, 서로 엇갈려서 더 슬프기도 하고 더 이해가 가기도 하는 아이러니랄까. 읽었던 책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어쩌면, 그런 사람이 되어주지 못했던 미안함이 아닐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조금씩 죽음이라는 것과 가까워지고 있다. 생물학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예전에는 나와 전혀 상관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던 혹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내 촌수를 따라 죽음이 찾아오는 느낌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 그리고, 나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인에서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인을 따라서 찾아오기도 하며, 사람이 아닌 다른 생물체를 통해서 찾아오기도 한다. 

     힘든 상황이 닥쳐올 때, 본능적으로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반응은 '회피'이다. 하지만, 함께 궁리를 한다면, 아픔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다면, 어쩌면 더 한 용기를 낼 수 있다면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분명, 누군가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아픔을 공감해주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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